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당의 1차 북벌 (문단 편집) ==== 국민혁명군의 [[난징]]-[[상하이]] 공략 ==== 국민당 내부의 계속되는 정쟁 가운데서도 북벌은 계속되고 있었다. 국민혁명군의 북벌에 맞서기 위해 북양군벌이 단결하자 북벌군은 1927년 1월 6일 난창에서 회의를 열고 대응을 논의했다. 동로군, 중앙군, 서로군을 나누어 장강 하류의 군벌들을 먼저 일소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 1. 동로군은 허잉친이 총지휘하며 항저우, 상하이를 목표로 한다. * 2. 중앙군은 총사령관 장제스가 직접 통솔하고 청첸이 이끄는 강우군, 리쭝런이 이끄는 강좌군으로 나누어 난징으로 행한다. * 3. 탕성즈가 총지휘하는 서로군은 섬서에 있는 펑위샹 부대와 연락을 하고 기회를 보아 하남성으로 진격한다. 1월 26일 동로군을 시작으로 각군이 진격을 시작했다. 한편 장쭤린은 강소와 절강 전선은 장쭝창과 쑨촨팡에게 맡기고 2월 8일 하남 진격 전문을 선포했다. >"직예, 산동 여합군 및 3,4 방면군은 나누어 진격하며 반드시 우한을 접수하고 광동과 호남을 취하도록 한다. 하남의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업신여기지 말고 그 일체의 모든 직위는 예전과 같다. 부대를 움직일 때에는 특별히 명령을 받고 움직이도록 한다." 봉천군대가 남하하자 하남의 우페이푸의 잔여 세력들은 잇달아 항복했다. 2월 6일 구영걸이, 2월 10일 전 대총통 [[차오쿤]]이, 2월 14일 토벌군 부사령 [[치셰위안]]이, 2월 16일 하남 군무 방판 미진표가 봉천 군벌에 투항했고 장쭤린은 미진표를 안국군 제18군 군장 겸 의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2월 중순에는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군대를 불러 장강 북쪽을 수비하려 했다. 3월에 이르러 장쭤린은 하남성 대부분을 함락시켰으나 남방에서 국민혁명군의 진격 속도도 신속했다. 바이충시가 지휘하는 동로군은 2월 10일 항저우를 함락하고 3월 18일 상하이의 남부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 3월 14일 송호 해군 함대사령관 양수장이 귀순하여 국민혁명군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3월 22일에 상하이가, 3월 24일에 난징이 함락되었다. 한편 상하이에서는 [[저우언라이]]가 지휘하는 공산당이 독자적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위해 여러차례 폭동을 일으켰으나 거듭 실패했다. 3월 21일의 80만명이 동원된 총파업은 3월 22일 [[쉐웨]]의 국민혁명군과의 공조로 마침내 성공할 수 있었다.[* 공산당의 폭동과 상하이 점령의 자세한 정황에 대해서는, [[4.12 상하이 쿠데타]] 문서 참조.] 3월 초에는 리쭝런이 안휘로 진입하자 쑨촨팡의 병사들이 앞을 다투어 항복했다. 결국 쑨촨팡은 장강을 넘어 도주했고 장쭤린의 대원수 추대에 참여했던 옌시산은 보경안민을 외치면서 발을 빼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